... 색은 그 사이에 있다.

하늘은 기억 속에서 더 파랗다

편집실에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하늘이 좀 죽었네요. 더 파랗게 가 주세요.” 촬영한 날 하늘은 맑았다. 그런데 모니터 위의 하늘은 기억보다 옅고, 어딘가 회색이 섞여 보인다. 우리는 그 차이를 보통 카메라의 한계나 앞선 보정의 잘못으로 돌린다. 이 글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 요청이 틀렸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때 우리가 맞추려는 ‘하늘색’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그것은 창밖에도, 촬영 원본에도 없다. 우리 머릿속에 있다. 우리는 하늘과 잎과 피부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 저장된 색을 꺼내어 화면과 맞대어 본다. 이 글은 하늘을 셋으로 나누어 부른다. 떠올린 하늘, 파일에 숫자로 남은 하늘, 지금 모니터에 보이는 하늘이다. 그 기억이 어떻게 보정의 첫 기준이 되고, 어느 순간 함정으로 바뀌는지를 바닷가 숏 하나를 앞에 두고 따라가 본다.

눈이 기억하는 색

우리는 하늘이 무슨 색인지 보지 않고도 안다. 잎은 초록, 피부는 살구색, 하늘은 파랑이라고 머릿속에 미리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익숙한 사물에 붙어 있는 색의 기억을 ‘기억색(memory color)’이라 부른다. 색채 연구에서 오래전부터 다루어 온 주제이고, 하늘과 풀과 피부 셋은 그중 가장 자주 쓰이는 예다. 이 기억에는 알려진 경향이 하나 있다. 익숙한 사물의 색을 떠올리게 하면 실제로 잰 색보다 더 선명하고 더 그 사물다운 쪽으로 기우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풀은 기억 속에서 더 초록이고, 하늘은 더 파랗다. 어느 쪽으로 얼마나 기우는지는 사물마다 다르다. 기억은 사진이 아니라 요약이어서, 그 사물이 가장 그것다웠던 순간만 남긴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흐린 날의 하늘, 그늘 속의 잎, 형광등 아래의 뺨은 요약에서 빠진다.

이 기억은 떠올릴 때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익숙한 사물은 색을 다 빼서 회색으로 맞춰 놓아도 그 사물의 색이 조금 섞여 보인다는 실험이 알려져 있다. 기억이 지금 보는 색에도 끼어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억색은 모니터 앞에서 꽤 쓸모가 있다. 벡터스코프(색의 종류와 세기를 원 위의 점으로 보여 주는 계기)를 띄우기 전에 우리는 이미 얼굴이 노랗게 떴는지, 잎이 탁해졌는지 안다. 모니터가 조금 틀어져 있어도 이 계기는 작동한다. 관객 쪽도 같다. 관객은 촬영장에 없었고 원본을 본 적도 없다. 그들이 색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화면이 자기 기억 속의 하늘과 잎과 피부에서 멀어졌을 때다. 그래서 기억색은 색보정의 첫 번째 기준이 된다. 다만 그 기준이 어디서 왔는지는 잘 묻지 않는다.

화면에 남은 하늘

실제 하늘은 한 가지 파랑이 아니다. 맑은 날에도 머리 위가 가장 짙고, 지평선 쪽으로 내려갈수록 희게 풀린다. 햇빛이 공기 속에서 흩어져 파랗게 보이는 것인데, 지평선 쪽은 빛이 더 두꺼운 공기층을 지나오기 때문이다. 해에 가까운 쪽은 거의 희고, 아침과 저녁의 하늘은 낮의 하늘과 또 다르다. 카메라는 이 단계를 한 프레임에 담는다. 다만 그대로 담지는 않는다. 노출을 얼굴에 맞추면 하늘은 흔히 흰색 가까이로 밀려 찍히고, 화이트밸런스(흰색을 어디에 둘지 정하는 설정)에 따라 파랑의 양도 달라진다. 파일에 남은 하늘은 그날의 하늘에 촬영의 선택이 더해진 숫자다. 기억은 그중 가장 짙은 한 조각, 맑은 날 고개를 들어 본 머리 위의 하늘만 남긴다. 화면의 하늘이 죽어 보이는 것은 이 둘의 거리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기준이 함정이 되는 자리

오후의 편집실이다. 화면에는 바닷가에서 찍은 숏이 떠 있다. 늦은 오후, 해는 낮고, 인물은 해를 등지고 모래 위에 서 있다. 머리카락 가장자리에 금빛이 걸려 있고, 뺨은 주황에 가깝게 익어 있다. 그 뒤의 하늘은 위쪽이 옅은 파랑이고 수평선 가까이는 거의 흰색이다. 벡터스코프의 하늘 점은 파란 쪽으로 조금 기울었을 뿐 중심에서 멀지 않다. 그런데 모니터를 보는 눈에는 그 하늘이 흐리게 보인다. 손이 먼저 움직인다. 하늘만 골라 파랑을 올린다. 점이 파란 쪽으로 길어지고, 하늘이 기억 속의 그 색에 가까워진다. 한 번 더 올린다. 이제 하늘은 충분히 파랗다. 그런데 눈을 하늘에서 떼고 프레임 전체를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금빛 머리카락과 주황 뺨은 해가 낮게 떠 있다고 말하는데, 그 뒤의 하늘은 해가 머리 위에 있다고 말한다. 한 프레임 안에 두 개의 시각이 있다. 다음 숏으로 넘기면 같은 바닷가의 넓은 그림이 나오고, 거기 하늘은 아직 옅은 청회색이다. 두 숏이 이어 붙지 않는다. 여기서 두 하늘이 맞선다. 하나는 기억이 원하는 하늘이다. 맑은 날 머리 위의 가장 짙은 조각이고, 시각도 자리도 없는 색이다. 다른 하나는 그 숏이 실제로 겪은 하늘이다. 낮은 해와 바다 위의 습기, 수평선 쪽으로 희게 풀리는 단계가 그대로 들어 있다. 함정은 기억이 틀려서 생기지 않는다. 기억에 시각과 자리가 없어서 생긴다. 하늘만 기억에 맞추면 하늘은 옳아지고 장면은 틀어진다. 잎을 기억의 초록으로 올리면 그늘 속 얼굴이 어색해지고, 피부를 기억의 살구색으로 밀면 창가에 앉은 사람이 실내등 아래로 옮겨진다. 그래서 하늘을 만질 때는 하늘만 보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 파랑을 조금만 남기고 손을 멈춘 뒤, 머리카락과 뺨과 다음 숏이 함께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같이 본다.

결론

기억 속의 색은 버릴 것이 아니다. 그 기억이 없으면 우리는 얼굴이 틀어진 것도, 숏 사이에 하늘이 어긋난 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다만 앞에서 본 대로 기억은 사물의 대표를 남길 뿐, 그 사물이 어느 날 어느 시간에 어떤 공기 속에 있었는지는 남기지 않는다. 보정의 기준으로 기억을 꺼낼 때 함께 꺼내 볼 질문은 하나다. 지금 고치려는 색이 틀린 것인가, 아니면 기억과 다른 것인가. 틀린 것이면 고치고, 다른 것이면 장면의 편을 든다. 우리는 혹시 그동안 하늘 하나를 살리느라 그날의 빛 전체를 지워 온 것은 아닐까. 하늘은 기억 속에서 더 파랗다. 그것은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라 기억이 일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기억 속 하늘은 그대로 두어도 된다. 화면의 하늘은 그날의 하늘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