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종이 한 장만 찍어 두면 화이트는 잡힌다. 촬영장에서도 색보정실에서도 우리는 이 말을 자주 한다. 종이는 원래 흰 것이고, 카메라에 그 종이를 기준으로 잡아 주면 나머지 색은 따라온다는 믿음이 그 말 밑에 깔려 있다. 그런데 같은 종이가 창가에서는 조금 푸르게, 전등 아래에서는 조금 누렇게 찍힌다. 숏마다 다른 색으로 들어오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모두 흰색이라고 부른다. 이 글은 흰색을 종이가 가진 성질로 보지 않는다. 종이가 되돌려 보내는 빛은 그 자리에 들어온 빛의 색을 따르고, 그것을 흰색이라고 정하는 것은 그 빛에 익숙해진 눈이다. 창가의 흰 종이가 카메라를 지나 화면 위에서 다시 흰 종이가 되기까지, 흰색이 어디서 어떻게 정해지는지 그 길을 따라가 본다.
종이에 닿은 빛
흰 종이는 빛을 만들지 않는다. 들어온 빛을 거의 모든 색에서 고르게 되돌려 보낼 뿐이다. 그래서 종이에서 나오는 빛의 색은 종이가 아니라 종이에 닿은 빛이 정한다. 들어온 빛이 주황빛이면 주황빛이 나가고, 푸른빛이면 푸른빛이 나간다. 빛의 이런 기울기를 우리는 색온도(빛이 주황 쪽인지 파랑 쪽인지를 켈빈 K 단위의 숫자 하나로 적는 방식)로 부른다. 숫자가 낮을수록 주황 쪽이고 높을수록 파랑 쪽이라, 주황빛을 따뜻하다고 부르는 버릇과는 방향이 반대다. 영화용 텅스텐 조명은 3200K, 한낮 햇빛은 5500K 안팎이고, 맑은 날 그늘은 그보다 더 파랑 쪽이다. 색온도는 빛의 성격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종이 이야기에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같은 종이를 이 빛들 아래 두고 계기로 재면 되돌아 나온 빛의 값은 그때마다 다르다. 종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뀐 것은 빛뿐이다. 그러니 종이가 가진 것은 흰색이 아니라, 들어온 빛을 거의 그대로 돌려주는 성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눈으로 보면 종이는 어느 빛 아래서나 흰색으로 보인다. 전등을 켠 방에 들어서면 처음 잠깐은 방 전체가 누렇게 보이다가, 곧 종이는 종이로, 벽은 벽으로 돌아온다. 눈이 그 자리의 빛에 맞추어 기준을 옮기기 때문인데, 이것을 색순응(눈이 주변 빛에 익숙해져 그 빛을 색 없는 빛으로 다시 삼는 일)이라고 부른다. 이 익숙해짐은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완전하지도 않다. 저녁에 전등 아래 앉아 있다가 창밖을 보면 바깥이 유난히 푸르게 보이는 것도 같은 일이다. 바깥이 푸른 것이 아니라, 방 안의 주황빛에 맞춰진 눈이 바깥을 보고 있는 것이다. 눈은 그 자리에서 가장 밝고 색이 적어 보이는 것을 흰색으로 삼고 나머지 색을 거기에 맞추어 읽는 경우가 많다. 잰 것과 본 것은 여기서 갈린다. 두 빛 아래 종이에서 나온 빛의 값은 다르다. 그런데 둘 다 흰색으로 보인다. 종이가 흰색이 되는 자리는 종이 위가 아니다. 빛이 닿은 종이와, 그 빛에 익숙해진 눈 사이 어딘가다.
카메라가 정해 둔 값
카메라에는 이 익숙해짐이 없다. 센서는 들어온 빛의 값을 들어온 대로 적을 뿐, 방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빛을 색 없는 빛으로 삼을지 사람이 알려 주어야 하는데, 그 설정이 화이트 밸런스다. 회색 카드를 그 자리의 빛 아래 두고 기준을 잡으면, 카메라는 그 빛의 기울기를 빼고 카드를 색 없는 값으로 적는다. 전등의 주황도, 그늘의 파랑도 파일 속에서는 그렇게 지워진다. 필름 시기에도 같은 선택은 있었다. 주광용과 텅스텐용 필름이 따로 있었고, 어느 쪽을 넣느냐로 그 숏의 기준이 정해졌다. 다만 화이트 밸런스가 맞추는 것은 파일 속 숫자까지다. 그 숫자가 화면에서 희게 보일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화면이 내는 빛과, 그 화면을 보는 눈이 정한다.
화면 속 흰 종이
색보정실의 불이 꺼져 있다. 벽은 중간 회색이고, 모니터 뒤에는 낮은 조명만 켜져 있다. 화면에는 책상 위의 흰 종이 한 장이 떠 있다. 왼쪽에서는 스탠드의 전등이, 오른쪽에서는 창으로 들어온 늦은 오후의 빛이 같은 종이를 비춘다. 카메라의 기준은 전등 쪽에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종이의 왼쪽은 색 없는 값에 가깝고, 오른쪽은 파랑 쪽으로 기울어 있다. 벡터스코프(색이 어느 쪽으로 치우쳤는지를 원 위의 자국으로 보여 주는 계기)에서 종이는 한 점이 아니다. 가운데에서 파랑 쪽으로 길게 번진 자국으로 보인다. 컬러리스트는 먼저 창 쪽에 기준을 맞춰 본다. 종이의 오른쪽이 가운데로 돌아오는 대신 왼쪽이 주황으로 넘어가고, 그 옆에 앉은 배우의 뺨도 같이 넘어간다. 그는 되돌린다. 이번에는 중간쯤에 세운다. 종이는 반은 누렇고 반은 푸른 채로 남고, 배우의 얼굴은 어느 쪽에도 끌려가지 않는다. 그는 종이를 기준에서 내려놓고 얼굴을 기준으로 삼는다. 두 종류의 빛이 섞인 자리에서는 기준 하나로 양쪽을 다 희게 만들 수 없다. 이 숏에서 흰색은 종이 위에 없다. 그가 정한 자리에 있다. 여기서 두 가지 빛을 갈라 둘 필요가 있다. 장면 안의 빛은 종이에 닿았다가 되돌아 나온 빛이고, 그 색은 전등과 창이 정했다. 화면이 내는 빛은 모니터가 스스로 만드는 빛이고, 그 흰색은 장면과 상관없이 미리 약속되어 있다. 영상 표준은 햇빛을 닮게 정해 둔 흰색을 쓰는데, 6500K 안팎의 이 기준을 D65라고 부른다. 모니터 뒤 조명과 벽 색을 그 흰색에 맞추라는 권고가 있는 것도, 보는 눈의 기준을 모니터의 흰색에 두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화면 속 흰 종이가 흰색이 되려면 두 가지가 맞아야 한다. 종이에서 나온 빛의 값이 모니터가 정한 흰색의 자리로 옮겨져야 하고, 그 모니터를 보는 눈이 그 흰색에 익숙해져 있어야 한다. 컬러리스트의 손은 종이를 흰색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종이에서 나온 빛을, 이 방의 눈이 흰색이라고 부를 자리로 옮겨 놓는 것이다.
결론
흰색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빛을 고르게 되돌리는 성질은 종이에 있다. 그러나 희게 보이는 일은 그 자리의 빛과 그 빛에 익숙해진 눈이 함께 만든다. 빛이 종이에 색을 남기고, 눈이 그 빛에 익숙해져 그 색을 지우고, 카메라는 그 지움을 하지 못해 사람에게 묻고, 화면은 약속된 한 자리를 흰색이라 부른다. 종이와 빛 사이, 빛과 눈 사이, 화면과 방 사이에서 흰색은 그때마다 새로 정해진다. 그래서 ‘흰색을 맞춘다’는 말은 어딘가에 있는 흰색을 찾아 가져오는 일이 아니다. 이 장면의 빛과 이 방의 눈이 함께 흰색이라 부를 자리를 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혹시 종이를 찍어 두는 것으로 그 자리를 찾았다고 믿어 온 것은 아닐까. 종이는 화면 위에서 다시 희다. 그래도 흰색은 거기에 없었다. 우리가 거기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