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은 그 사이에 있다.

옆의 색이 이 색을 바꾼다

현장에서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스코프에서 값이 맞으면 끝이라고. 그런데 같은 편집실에서 이런 말도 자주 듣는다. 어제는 분명히 맞았는데 오늘 보니 누렇다고. 모니터는 그대로고 파일도 그대로다. 달라진 것은 벽에 새로 붙인 포스터, 화면 한구석에 띄워 둔 흰 창, 커튼 틈으로 든 아침빛 정도다. 우리는 그럴 때 눈을 의심하거나 모니터를 의심한다. 눈이 피곤했거나 모니터가 틀어졌거나, 둘 중 하나로 정리하고 넘어간다. 모니터를 다시 보정해도 그 말은 얼마 뒤 돌아온다. 보정이 틀려서가 아니라, 보정이 보지 않는 것이 있어서다. 이 글은 눈도 모니터도 탓하지 않는다. 색은 혼자 보이지 않는다는 쪽을 본다. 같은 회색도 곁에 놓인 색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그 곁에는 그림 속의 배경만이 아니라 화면 밖의 벽과 창까지 들어간다. 이 글은 그 곁이 우리의 판단을 어디까지 흔드는지, 그리고 그중 무엇을 고쳐야 하고 무엇을 두어야 하는지를 따라간다.

두 조각의 회색

회색 두 조각을 같은 값으로 만든다. 하나는 검은 바탕 위에, 하나는 흰 바탕 위에 놓는다. 잰 값은 같다. 화면이 내는 빛도 같다. 그런데 검은 바탕 위의 조각은 더 환하게 보이고, 흰 바탕 위의 조각은 더 가라앉아 보인다. 한 조각을 집어 다른 바탕으로 옮겨 보면, 같은 조각이 자리를 옮기는 동안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한다. 달라진 것은 조각이 아니라 조각이 보이는 밝기다. 눈은 한 점의 밝기를 그 자체로 재지 않고 둘레와 견주어 읽는데, 이 현상을 동시대비(simultaneous contrast), 곧 나란히 놓인 색이 서로를 밀어내며 보이는 일이라 부른다. 색도 따로 같은 일을 겪는다. 같은 회색 조각을 붉은 바탕 위에 두면 조각에 옅은 청록 기가 도는 것으로 보이고, 파란 바탕 위에 두면 누런 기가 도는 것으로 보인다. 바탕의 색과 반대쪽으로 기우는 셈이다. 조각은 손대지 않았다. 바뀐 것은 옆이다.

이 일을 처음 체계적으로 적은 사람은 화가가 아니라 화학자였다. 미셸 외젠 셰브뢸(Michel Eugène Chevreul, 1786-1889)은 파리의 고블랭(Gobelins) 염색 공방에서 일하며 검은 실이 흐리다는 불평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료를 다시 검사해도 흠이 없었고, 흐려 보이는 정도는 그 실 옆에 어떤 색 실이 짜여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염료 대신 눈을 조사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그 관찰을 1839년에 책으로 묶었다. 한 세기 뒤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 1888-1976)는 색종이를 자르고 붙이는 수업으로 같은 사실을 가르쳤고, 그 수업을 1963년에 책으로 냈다. 한 가지 색이 바탕에 따라 두 가지 색으로 보이게 만들어 보라는 과제였다. 두 사람 다 염료나 종이를 탓하지 않았다. 색은 이웃이 정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일을 다시 짰을 뿐이다.

눈이 견주는 이유

눈은 자가 아니다. 망막은 한 점이 받은 빛을 그 점만 따로 보고하지 않고 옆 점과 견주어 차이를 키워 내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뒤의 뇌가 그림을 읽는 방식도 함께 작용한다. 원리는 이 정도로 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다. 눈은 절대값 대신 차이를 보도록 되어 있고, 그래서 어두운 방에서도 밝은 들판에서도 같은 얼굴을 알아본다. 이것은 고장이 아니라 눈이 늘 하는 일이다. 다만 모니터 앞에서는 그 일이 거꾸로 작동한다. 우리가 이 회색이 중립이라고 말할 때, 그 판단은 회색 혼자가 아니라 회색을 둘러싼 모든 것에 기대어 있다. 둘레가 달라지면 판단도 따라 움직인다. 눈이 그 자리의 빛에 서서히 익숙해지는 일은 또 다른 이야기이고, 이 글은 지금 옆에 있는 색이 당장 일으키는 일만 다룬다.

화면 안의 옆과 화면 밖의 옆

한 편집실이 있다. 밤이다. 화면에는 탁자 앞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떠 있고, 얼굴 바로 옆에는 주황빛 스탠드가 켜져 있다. 모니터 뒤 흰 벽에는 지난 작품의 포스터가 붙어 있고, 화면 왼쪽에는 메일 창이 열려 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다. 우리는 얼굴의 밝은 부분을 잡고 조금 식힌다. 아직 누렇게 보인다. 조금 더 식힌다. 이제 됐다. 다음 날 아침 같은 숏을 다시 연다. 메일 창은 닫혀 있고, 포스터는 떼어져 있고, 커튼 틈으로 흐린 하늘빛이 든다. 얼굴이 파랗게 보인다. 스코프를 띄운다. 파형은 어젯밤과 같은 자리에 있다. 잰 값은 그대로이다. 달라 보이는 쪽은 얼굴이 아니라 얼굴의 둘레다. 여기서 둘레를 둘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화면 안의 옆 색이다. 얼굴 곁의 주황빛 스탠드는 극장의 관객도 똑같이 본다. 그 스탠드 때문에 얼굴이 조금 차게 보인다면, 그것은 그림의 일부이고 관객의 눈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고칠 대상이 아니라 지켜야 할 관계다. 다른 하나는 화면 밖의 옆 색이다. 흰 메일 창, 벽의 포스터, 아침의 하늘빛은 우리만 본다. 관객의 극장에는 없는 것들이 우리의 판단에만 끼어들어 손을 틀어 놓는다. 어젯밤의 보정은 얼굴을 고친 것이 아니라 메일 창과 포스터를 고친 것이었다. 방송과 영화 쪽의 시청 환경 기준이 모니터 뒤를 중성 회색으로 두고, 주변을 어둑하게 하고, 화면의 흰색과 같은 색온도의 뒷조명을 권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중성 회색이 대비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눈은 여전히 옆과 견주어 본다. 다만 어느 한 색으로 기우는 일을 막아 준다. 그래서 잰 값과 본 느낌이 다를 때 우리가 할 일은 둘이다. 하나는 둘 다 적어 두는 것이다. 파형은 같은 자리에 있다, 그런데 오늘은 파랗게 보인다, 하고 나란히 적으면 어느 쪽이 둘레의 영향인지 다음에 가려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화면 밖의 옆을 고르는 것이다. 흰 창을 닫고, 포스터를 떼고, 모니터 뒤에 회색을 두고, 뒷조명을 켠다. 화면 안의 옆은 그대로 둔다. 그것은 관객의 몫이다.

결론

색은 혼자 오지 않는다. 같은 값으로 만든 회색 두 조각이 검은 바탕과 흰 바탕 위에서 다른 밝기로 보이듯, 모니터 안의 얼굴도 벽과 창과 포스터 사이에서 날마다 다른 얼굴로 보인다. 그것은 얼굴의 잘못도 모니터의 잘못도 아니다. 눈은 어제도 오늘도 같은 셈을 했고, 달라진 것은 그 셈에 들어간 이웃이다. 벽의 색, 흰 창의 밝기, 뒷조명의 유무는 장비 목록에 오르지 않지만,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매번 조금씩 틀어 놓는다. 우리는 혹시 색을 고르는 동안 색의 이웃은 보지 않아 온 것은 아닐까. 셰브뢸이 염료 대신 돌아본 곳은 실이 아니라 실의 옆이었다. 우리가 돌아설 곳도 거기다. 커브를 만지기 전에 화면 밖의 둘레를 보고, 화면 안의 둘레는 관객에게 남겨 둔다. 그다음에야 이 회색이 정말 중립인지 물을 수 있다. 다음에 회색이 누렇게 보일 때는 손보다 먼저 둘레를 본다. 얼굴이 바뀐 것인지, 얼굴 옆이 바뀐 것인지. 옆의 색이 이 색을 바꾼다. 그러니 이 색을 보려면, 옆부터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