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은 그 사이에 있다.

피부는 한 가지 색이 아니다

편집실에서 얼굴을 고를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피부톤은 선에 올리면 된다.” 벡터스코프(화면의 색을 원판 위의 점으로 보여 주는 계기)에는 빨강과 노랑 사이에 가는 선이 하나 그어져 있고, 손은 얼굴의 점들을 그 선 쪽으로 끌어오는 일부터 한다. 점이 선에 얹히면 안심이 되고, 선에서 벗어나면 어딘가 틀린 것처럼 보인다. 선에서 벗어난 얼굴은 틀린 얼굴이고, 선 위의 얼굴은 맞는 얼굴이라는 셈이다. 이 글은 그 선을 정답으로 보지 않는다. 피부는 한 가지 색이 아니라, 살갗의 색소와 그 아래를 흐르는 피의 색과 겉면에 되비친 조명이 겹쳐 보이는 층이다. 선은 그 겹침이 화면 위에서 자주 떨어지는 자리를 적어 둔 안내선일 뿐이다. 우리는 혹시 그 자리를, 얼굴마다 다른 겹침보다 먼저 믿어 온 것은 아닐까. 이 글은 선 위에 올라간 점 하나를 다시 세 겹으로 풀어 본다.

세 겹의 살갗

피부의 색은 한 군데서 오지 않는다. 살갗의 바깥층에는 멜라닌(갈색 계열을 내는 색소)이 있어 빛을 얼마나 삼킬지를 정한다. 그 아래로는 핏줄이 지나가고, 피 속의 헤모글로빈(피를 붉게 보이게 하는 성분)이 살갗에 붉은 기를 올린다. 가장 겉에는 살갗 표면이 조명을 그대로 되비치는 반사가 있는데, 이 반사는 피부의 색이 아니라 조명의 색을 띤다. 색소의 층, 피의 층, 겉면의 층. 우리가 ‘피부색’이라 부르는 것은 이 셋이 한 자리에서 겹쳐 눈에 닿은 결과다. 어느 사람의 피부든 이 층의 구조는 같다. 다른 것은 색소의 양과 분포, 핏줄이 겉에서 얼마나 가까운가 같은 양과 깊이이지 구조가 아니다. 밝은 피부와 어두운 피부는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같은 재료가 다른 양으로 겹친 것이다. 그래서 피부는 색의 종류보다 밝기와 짙기에서 서로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빛은 피부 겉에서 다 튕겨 나오지 않는다. 일부는 겉면에서 바로 되비치고, 나머지는 살갗 속으로 조금 들어갔다가 흩어진 뒤 다시 나온다. 겉면에서 되비친 빛은 조명의 색을 그대로 갖고, 속을 거쳐 나온 빛은 색소와 피를 지나오면서 피부의 색을 띤다. 역광 앞에 선 사람의 귀가 붉게 비쳐 보이는 것이 그 쉬운 예다. 그래서 같은 얼굴도 빛이 어디서 오느냐에 따라 세 겹이 보이는 비율이 달라진다. 정면에서 세게 비추면 겉면 반사가 두드러져 조명의 색이 더 많이 섞여 보이고, 옆이나 뒤에서 비추면 속에서 나온 빛이 더 앞에 나온다. 같은 얼굴에서도 이마와 뺨과 턱은 서로 다르다. 피부는 한 장의 색종이가 아니라, 빛이 들고 나는 얇은 겹이다. 피부를 한 겹의 색으로 다루는 순간 우리가 잃는 것은 색이 아니라 이 깊이다.

화면에 남은 값

카메라는 피부를 담지 않는다. 그 조명 아래 피부에서 나온 빛을 담는다. 같은 얼굴이라도 조명이 바뀌면 화면에 담기는 값은 달라진다. 벡터스코프는 그 값을 색의 종류(색상)와 짙기(채도)로 펼쳐 보여 주는 계기다. 가운데는 색이 없는 자리이고, 바깥으로 갈수록 색이 짙어지며, 둘레를 따라 색의 종류가 바뀐다. 그 원판 위에 그어진 피부색 기준선, 흔히 말하는 스킨톤 라인은 여러 제조사의 스코프가 관습적으로 그어 둔 안내선이다. 세 겹이 보통의 조명 아래 겹치면 그 합은 대개 그 근처에 떨어지고, 선은 그 ‘대개’를 적어 둔 표시다. 선은 색의 종류를 가리킬 뿐, 그 색이 얼마나 밝고 짙은지, 어느 겹이 앞에 나왔는지는 가리키지 않는다. 그래서 “피부가 선에 있다”보다 “이 숏의 피부 값이 선 근처에 있다”가 정확한 말이다.

창가의 인터뷰 숏

늦은 오후의 인터뷰 컷을 모니터에 띄운다. 인물은 창을 왼쪽에 두고 카메라를 반쯤 비켜 앉아 있다. 창 쪽 뺨은 희게 떠 있고, 반대쪽 뺨은 그늘 속에서 붉은 기를 띠고 있다. 벡터스코프를 켜면 얼굴의 점들은 한 덩어리로 모이지 않고 선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다. 창 쪽은 선에서 노랑 쪽으로, 그늘 쪽은 빨강 쪽으로 비켜나 있다. 잰 값은 그렇다. 그런데 모니터 위의 얼굴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창가의 뺨은 낮의 빛을 받아 서늘하게, 그늘의 뺨은 조금 붉게 보일 뿐이다. 우리는 얼굴 전체를 잡고 점들을 선 쪽으로 당긴다. 점들은 선 위로 모이고 계기는 보기 좋게 정리된다. 그런데 화면을 보면 그늘 쪽 뺨의 붉은 기가 빠지면서 얼굴 한쪽이 종이처럼 납작해 보인다. 창 쪽 뺨은 그대로 희다. 조정을 되돌린다. 이번에는 창 쪽 뺨의 밝은 부분만 따로 골라 조명이 얹은 노란 기를 조금 거두고, 그늘 쪽은 손대지 않는다. 점들은 여전히 선 양쪽으로 퍼져 있다. 그러나 화면 속 얼굴은 창가에 앉은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 여기서 두 얼굴을 나란히 세워 볼 수 있다. 하나는 선에 맞춘 얼굴이다. 점들을 선 위로 모으면 두 뺨의 차이가 줄고, 얼굴은 어느 빛 아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고른 색이 된다. 다른 하나는 장면에 맞춘 얼굴이다. 점들이 늘어진 채로 두되 그 가운데가 선 근처에 머물게 하면, 얼굴은 창과 그늘 사이에 앉아 있던 그 자리를 그대로 지닌다. 양쪽 다 선에서 출발했다. 다만 한쪽은 선에서 멈췄고, 다른 쪽은 선에서 얼굴로 돌아갔다. 같은 ‘선에서 벗어남’이 한쪽에서는 조명이 얹은 값으로, 다른 쪽에서는 그 자리의 빛이 피부 속을 거쳐 남긴 값으로 보였다. 벡터스코프는 둘을 같은 거리로 보여 주지만, 그 거리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그것을 가르는 일은 선이 아니라 화면 속 얼굴을 다시 보는 눈에 남는다.

결론

피부톤을 선에 올린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 말은 세 겹을 한 점으로 접은 뒤의 이야기다. 색소와 피의 색과 겉면의 반사는 어느 얼굴에서나 같은 순서로 쌓이고, 다만 겹의 양과 깊이가 다를 뿐이다. 선은 그 겹침이 화면 위에서 자주 떨어지는 자리를 적어 둔 안내선이고, 우리는 그 표시에서 출발해 어느 겹이 어긋났는지 묻는 쪽으로 간다. 우리가 그 선을 정답으로 읽어 온 것은 아닐까. 선 위에 얼굴을 올려놓고 일을 마치는 대신, 선에서 출발해 그 얼굴이 받은 빛을 따라가는 편이 이 글이 제안하는 읽기다. 점이 선에 얹혔는지가 아니라, 어느 겹을 움직였는지가 남는 질문이다. 다음에 벡터스코프 앞에서 손이 먼저 선 쪽으로 가려 할 때, 창가에 앉아 있던 그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한쪽 뺨은 희고 한쪽 뺨은 붉은, 그래서 점이 선 양쪽으로 퍼져 있던 얼굴이다. 그 퍼짐은 틀림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빛을 받고 있다는 기록이다. 피부는 한 가지 색이 아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