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는 앞뒤 숏의 색을 잇는 일, 곧 숏 매칭(shot matching)을 ‘같게 만드는 일’이라고 부른다. 넓게 잡은 숏의 벽이 이 회색이면 가까이 잡은 숏의 벽도 그 회색이어야 하고, 두 숏의 그래프가 겹치면 일이 끝난 것으로 친다. 그 말 뒤에는 늘 기준이 되는 한 장이 있고, 그 한 장은 ‘그 순간의 빛’으로 불린다. 미술 쪽에도 짝이 되는 통념이 있다. 모네는 눈앞의 빛을 본 그대로 캔버스에 옮긴 화가, 한 점에 한 순간을 붙잡은 화가라는 말이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루앙 대성당» 연작 앞에 서면 그 말은 자연스럽게 들린다. 어느 두 점도 서로 같지 않고, 한 점 한 점이 한 순간처럼 보인다. 이 글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모네가 캔버스에 남긴 것은 한 순간의 빛이 아니라 순간과 순간 사이의 차이였다고 본다. 그리고 그 차이를 알아보는 눈이, 두 숏을 같게 만드는 우리의 일과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갈라지는지 따라가 본다.
순간이라는 통념
한 순간을 그대로 옮긴다는 말은 그림의 사정과 맞지 않는다. 물감은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리고, 성당 정면을 덮을 만큼의 붓질은 한 시간 안에 끝나지 않는다. 모네는 1892년과 1893년에 루앙에서 성당 맞은편 건물의 창 안에 자리를 잡고, 빛이 바뀌면 그리던 캔버스를 내려놓고 다른 캔버스를 꺼내는 식으로 여러 점을 함께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캔버스는 여러 날에 걸쳐 손보았고, 현장에서 끝내지 않고 화실로 가져가 오래 손질한 뒤에야 내놓았다. 그렇다면 한 점의 그림에는 한 순간이 아니라 여러 날의 비슷한 시각이 겹쳐 있다. 어느 날은 구름이 지나갔을 것이고 어느 날은 공기가 더 맑았을 것이다. 캔버스 위의 빛은 그 날들에서 되풀이된 것에 가깝다. 우리가 ‘그 순간의 빛’이라 부르는 것은 화가가 여러 번 확인하고 고른 빛이라 할 수 있다. 순간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여러 순간을 거쳐도 남는 것만 남긴 셈이다.
그가 바꾸지 않은 것이 먼저다. 자리, 성당, 돌이다. 창은 같은 창이고, 창 너머의 돌은 같은 돌이다. 그는 변수를 하나만 남겼다. 실험에서 조건을 고정하듯 건물을 고정하고 빛만 흐르게 두었다. 그래서 연작의 어느 한 점을 떼어 놓고 보면 그저 성당 그림이지만, 두 점을 나란히 두면 처음으로 빛이 보인다. 어떤 그림의 그늘은 푸르게 보이고, 다른 그림의 같은 자리는 주황에 가깝게 보인다. 그림마다 붙은 제목이 아침이나 햇빛이나 흐린 날을 말하지만, 그 제목은 뒤에 붙은 것이 많아 시각과 날씨의 증거로 삼기는 어렵다. 그래도 모네가 이 그림들을 따로따로가 아니라 여러 점을 나란히 걸어 비교하도록 묶어 내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른 점 안팎으로 알려진 연작은 서른 개의 순간이 아니라 서른 개의 차이를 걸어 둔 벽이라 할 수 있다. 한 점으로는 빛을 적을 수 없으니 여러 점의 사이에 빛을 적은 것이다.
돌의 색과 빛의 색
여기서 셋을 갈라 적어 두어야 한다. 첫째는 그날 루앙 광장에 실제로 있던 빛이다. 그 빛은 지금 없다. 둘째는 캔버스 위 물감의 색이다. 지금 잴 수 있지만, 백 년 넘게 변색과 바니시(그림 표면을 덮는 투명한 보호막)의 영향을 받았다. 셋째는 보는 사람의 인상이다. 전시실의 조명과 옆에 걸린 그림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모네가 본 빛’이라 부르는 것은 첫째가 아니라, 그의 눈을 거쳐 둘째로 남은 것이다. 그러니 그림의 색을 그날 조명의 증거로 쓸 수는 없다. 그래도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돌은 한 가지 돌이고, 돌이 빛을 되돌려 보내는 비율은 아침과 저녁에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눈에는 다른 색으로 보인다. 돌에 닿는 빛의 색과 양이 바뀌기 때문이고, 그런데도 우리가 그것을 회색 돌로 알아보는 것은 눈이 조명의 몫을 어느 정도 빼고 보기 때문이다. 모네가 그린 것은 돌의 색이 아니라 돌에 닿은 빛의 색이라 할 수 있다.
차이를 지우는 눈
편집실의 불이 꺼져 있다. 모니터에는 두 숏이 번갈아 뜬다. 앞은 창가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을 넓게 잡은 숏이고, 오전에 찍었다. 뒤는 한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 잡은 숏이고, 구름이 낀 오후에 찍었다. 화면을 반으로 갈라 둘을 나란히 세운다. 앞 숏의 창은 노랗게 밝고 뺨의 그늘은 푸르게 보인다. 뒤 숏의 창은 희고, 같은 뺨의 그늘은 회색으로 보인다. 파형(밝기의 분포를 그래프로 보여 주는 계기)에서도 뒤 숏의 얼굴은 앞 숏보다 낮게 찍힌다. 창은 같은 창이고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바뀐 것은 몇 시간 사이의 해와 구름뿐이고, 같은 창에서 온 빛이 몇 시간 뒤에는 다른 색으로 뺨에 닿아 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모네가 창 안에서 본 것과 같은 것을 본다. 같은 돌, 다른 빛. 그리고 여기서 길이 갈린다. 모네는 그 차이를 남겼다. 아침과 저녁을 따로 그려 나란히 걸고, 보는 사람이 그 사이를 걷게 했다. 우리는 그 차이를 지운다. 뒤 숏의 얼굴에서 회색 기운을 덜고 창에서 온 노란 빛을 뺨의 밝은 쪽에만 얹어, 관객이 두 숏을 같은 오전으로 믿게 한다. 하는 일은 반대지만 눈이 하는 일은 같다. 둘 다 돌의 색이 아니라 빛의 색을 찾아낸다. 앞 숏과 뒤 숏에서 무엇이 같은 돌이고 무엇이 달라진 빛인지 가려내지 못하면, 얼굴을 맞추려다 창까지 함께 틀어 놓게 된다. 모네가 연작으로 길러 낸 눈은 바로 이 가려내기라 할 수 있다. 다만 비유는 여기까지다. 컬러리스트는 차이를 지우고 모네는 차이를 남겼으며, 그림은 나란히 걸리고 영상은 차례로 보이며, 안료는 빛을 반사하고 화면은 스스로 빛을 낸다. 비유가 맞는 범위는 같은 것을 다른 빛 아래에서 알아보는 눈까지다. 영상의 관객은 두 숏을 동시에 보지 못하므로, 앞 숏의 기억과 뒤 숏의 현재가 눈 안에서 겹친다. 우리가 맞추는 것은 두 그림이 아니라 기억과 현재다.
결론
모네는 순간을 옮긴 화가가 아니라 차이를 적은 화가였다고 읽는다. 그가 루앙 대성당 앞에서 건물보다 시간을 그렸다고 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다. 적어도 그가 바꿔 끼운 것은 성당이 아니라 캔버스였다. 우리의 일도 다르지 않다. 두 숏 사이에서 무엇이 같은 돌이고 무엇이 다른 빛인지 가려낸 다음에야 손이 움직인다. 지우든 남기든 그 가려냄이 먼저다. 모네의 벽에서 그 차이는 눈에 보이게 남아 있고, 우리의 타임라인에서 그 차이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사라진다. 방향은 반대지만 먼저 한 일은 같다. 우리는 혹시 앞 숏 한 장을 ‘그 순간의 빛’이라 믿고, 그 앞뒤의 차이를 보지 않은 채 숫자만 맞춰 온 것은 아닐까. 연작이 나란히 걸린 벽 앞에 다시 선다. 돌은 한 점도 움직이지 않았고, 움직인 것은 빛과 우리 눈이다. 모니터 앞의 두 숏도 그렇게 보인다. 순간이 아니라 차이다. 같은 성당, 다른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