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은 그 사이에 있다.

검정에도 바닥이 있다

검정은 더 내리면 된다. 그림자가 떠 보이면 “블랙을 눌러라”, 깊이가 없으면 “검정을 더 검게”. 모니터 앞에서 우리는 이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한다. 그 말 뒤에는 검정이란 신호가 끝나는 곳, 그 아래로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있다. 이 글에서 ‘검정’은 화면의 검정을 뜻한다. 촬영 현장의 어둠이나 물감의 검정이 아니라, 모니터가 우리 눈앞에 내놓는 가장 어두운 자리다. 이 글은 그 검정을 신호가 멈추는 곳으로 보지 않는다. 누군가 정해 둔 바닥으로 본다. 바닥은 내려가는 곳이 아니라 놓이는 곳이고,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그 위에 서는 것이 달라진다. 그림자 속의 세부가 남을지, 밤 장면의 공기가 남을지는 검정이 얼마나 검으냐가 아니라 바닥이 어디에 있느냐에서 갈린다. 우리는 그 바닥을 매일 손으로 옮기면서도, 그것이 바닥이라는 사실은 자주 잊는다.

네 개의 검정

검정이라는 한 단어 안에는 서로 다른 넷이 겹쳐 있다. 첫째는 장면의 어둠이다. 촬영 현장에서 빛이 닿지 않은 골목 안쪽, 렌즈가 받은 빛이 거의 없는 자리다. 둘째는 신호값이다. 그 어둠이 파일 속 숫자로 바뀌었을 때, 규약이 “여기가 가장 낮은 자리”라고 정해 둔 값이다. 셋째는 화면이 내는 최소 빛이다. 모니터가 아무리 어둡게 하려 해도 더는 내려가지 못하는, 그 기기의 가장 어두운 빛이다. 넷째는 눈이 보는 검정이다. 옆에 밝은 것이 있을 때 눈이 “저것은 검다”고 받아들이는 자리로, 잰 값과 꼭 같지는 않다. 같은 밤 장면을 두고 촬영 감독은 첫째를, 편집실의 설정은 둘째를, 모니터는 셋째를, 보는 사람은 넷째를 말한다. 우리가 “검정이 떴다”, “검정이 눌렸다”고 말할 때, 이 넷 중 어느 것을 두고 하는 말인지는 매번 다르다. 그런데 말은 하나다. 혼동은 여기서 시작된다.

둘째 층, 신호값의 검정부터 보자. 파일 속 검정은 자연이 정한 것이 아니라 규약이 정한 것이다. 영상 신호는 쓸 수 있는 숫자 가운데 가장 낮은 값을 곧바로 검정으로 쓰지 않고, 그보다 조금 위에 검정의 자리를 따로 두는 경우가 많다. 방송용 범위와 전체 범위가 서로 다른 자리를 쓰고, 규약마다 그 값이 다르다. 블랙 레벨, 곧 어디까지를 검정으로 볼지 정해 둔 기준값은 그래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합의된 것이다. 바닥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다. 바닥은 땅이 아니라 마루다. 누군가 깔아 둔 것이고, 그 아래에 여유를 남긴 규약도 있다. 합의는 어기면 깨진다. 파일을 만든 쪽과 읽는 쪽이 검정의 자리를 서로 다른 규약으로 잡으면 검정이 회색으로 떠 보인다. 이것은 정보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설정에서 범위를 바로 잡으면 그대로 돌아온다. 이와 다른 사고가 눌린 검정이다. 바닥 근처에 있던 서로 다른 값들이 바닥 하나로 포개지는 일로, 이 손실은 그 파일 안에서는 되돌릴 수 없다. 뜬 검정을 보고 손으로 검정을 내리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을 눌러 버리게 된다. 우리는 혹시 설정의 문제를 손으로 고쳐 온 것은 아닐까.

화면마다 다른 바닥

셋째 층은 화면이다. 같은 파일을 두 화면에 띄우면 검정이 다르다. 액정 화면(LCD)은 뒤에서 비추는 빛을 액정이 가리는 방식이라 완전히 막지 못해, 가장 어두운 자리에도 빛이 조금 새는 경우가 많다. 화소 하나하나가 스스로 빛을 내는 화면(OLED)은 화소를 아예 꺼서 거의 빛이 나오지 않는다. 극장의 스크린에는 영사기의 빛만 닿는 것이 아니라, 벽과 좌석과 비상구 표시에서 되돌아온 주변광이 더해진다. 신호값의 바닥은 하나인데, 화면의 바닥은 기기마다, 방마다 다른 높이에 있다. 넷째 층은 그 위에 다시 놓인다. 파일의 값은 같다. 그런데 밝은 거실의 텔레비전에서는 회색으로 보이고, 불 끈 시사실에서는 구멍처럼 보인다. 눈은 옆에 있는 것과 견주어 보고, 어둠에 익숙해지면 같은 검정을 더 깊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밝기의 분포를 선으로 보여 주는 파형 모니터의 바닥과 눈이 느끼는 바닥은 따로 적어 둘 일이다.

바닥을 옮기는 손

불을 끈 보정실, 밤 골목 숏 하나가 멈춰 있다. 가로등 하나, 젖은 아스팔트, 골목 끝에 셔터를 내린 가게. 파형 모니터에서 어두운 쪽이 바닥 바로 위에 얇게 흩어져 있고, 그 얇은 띠 안에 젖은 바닥의 결, 벽에 기댄 자전거, 셔터의 가로줄이 들어 있다. 우리는 그림자 쪽을 주로 움직여 검정의 자리를 위아래로 옮기는 조정, 곧 리프트를 잡고 아래로 끌어내린다. 흩어져 있던 점들이 한 줄로 모여 바닥에 눕는다. 골목이 깊어진다. 가로등은 더 외로워 보이고, 젖은 바닥의 반사는 더 날카롭게 보인다. 잠시 뒤로 기대어 본다. 그러다 내보낸 파일을 책상 위의 휴대폰에 띄우고 천장 등을 켠다. 거실의 저녁처럼 밝아진 방에서 휴대폰 속 골목은 회색 판이 된다. 셔터의 가로줄도, 자전거도, 가로등 뒤의 전봇대도 없다. 그 파일을 다시 불러 리프트를 위로 올려 본다. 파형의 한 줄이 위로 들리기는 하지만 줄은 줄로 남는다. 흩어져 있던 점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손을 대기 전 단계로 되돌리자 거기에는 셔터의 가로줄이 있다. 바닥 위에 있던 것은 올리면 돌아오지만, 바닥 아래로 내려보낸 것은 원본에서만 돌아온다. 내보낸 파일에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여기서 두 검정을 나란히 세워 볼 수 있다. 바닥을 내린 검정은 밀도를 준다. 그림자가 무거워지고 장면이 닫히지만, 바닥 아래로 보낸 세부는 그 파일 안에서 사라진다. 바닥을 올린 검정은 공기를 준다. 안개 낀 아침, 먼지 앉은 창, 연기 찬 방처럼 어둠 사이에 무언가 떠 있는 느낌이 생기지만, 밝은 곳에 놓인 화면에서는 뿌옇게 뜬 회색이 된다. 하나는 되돌릴 수 없고, 하나는 되돌릴 수 있다. 되돌릴 수 있는 쪽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이 맞느냐는 장면이 정한다. 다만 바닥을 내려 얻는 단단함은 바닥을 올려 남긴 세부를 지우고 얻은 것이고, 그 선택이 어느 화면 앞에서 보일지를 먼저 정하고 나서 리프트를 잡는 편이 안전하다.

결론

검정은 신호가 멈추는 곳이 아니다. 장면의 어둠은 하나인데, 그 어둠을 받는 바닥은 셋이다. 규약이 정해 둔 바닥, 화면이 낼 수 있는 바닥, 눈이 받아들이는 바닥. 셋은 같은 높이에 있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중 어느 바닥을 두고 말하는지 분명히 하고, 신호의 바닥을 어디에 놓을지 장면을 보고 정하는 것이다. 눌린 검정은 돌아오지 않고, 뜬 검정은 설정으로 돌아온다. 이 둘을 가르는 눈이 먼저고, 리프트를 잡는 손은 그다음이다. 검정을 더 검게 만드는 일은 쉽다. 검정 안에 무엇을 남길지 정하는 일은 어렵고, 그것이 우리가 하는 일에 가깝다. 우리는 그동안 검정을 빛이 없는 곳으로만 읽어 온 것은 아닐까. 밤 골목의 가로등이 밝아 보이는 것은 그 옆의 어둠이 깊어서가 아니라, 그 어둠 안에 아직 자전거 한 대가 서 있어서일 수 있다. 파형 아래쪽에 흩어진 점들이 서 있는 자리, 그곳이 바닥이다. 검정에도 바닥이 있다. 그 바닥은 우리가 놓는다.